ARM 아니래 어쩌지

당분간 병원이라면 정말 사양이다!!!!

넘 좋다

아직 미심쩍은 맘이 남아있긴 하지만
암 아니라니까. 그걸로 됐다 싶다

병원 가는길에 이런저런 말을 하시던 엄마가 병원 들어서자마자 입을 다무셨다
한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우릴 보고 간호사가 암 아니니까 점심 먹고 오라고 했다
순간 엄마가 기쁨의 비명을 지르시는데, 나보다 더 많이 긴장하셨구나 싶었다

믿기 힘들지만 가장 듣고싶었던 얘기여서
되려 실감이 안났다

일단 의사 말 들어보자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대와 초조와 불안감이 섞여 빙글빙글 돌았다

진료실에서 의사 말을 들으니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물론 수술해서 꺼낸 걸 검사해봐야 확정인 거지만, 하면서도 해당 과를 나오자마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인생의 시계바늘이 비로소 다시 움직이는 기분.
비유가 아니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나를 두고 지나치던 세상 모든 것들이
다시 나를 돌아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메종 드 히미코(네타/스포일러 주의) 오늘 만난 책

아빠가 커밍아웃하고 나가버렸는데(참고로 히미코가 아빠 예명이다) 몇십 년이 지나 말기 암 선고를 받았고, 자신이 차린 게이 양로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감독이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암 얘기나 게이 얘기가 나오는 영화인줄은 모르고 샀는데.
충동구매가 이래서 무섭다

1.
대체로 평이하게 봤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엄마도 암투병으로 돌아가셨고, 딸은 병치레로 빚더미에 앉았다
아빠에게 버려져 엄마가 이렇게 되었다는 원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찾는 엄마의 모습에 사무쳤을 마음은 수긍이 간다

그럼에도 세상 외톨이로 살아가던 딸은
게이라는 gig 사이에 있으면서 점차 마음을 열었다.
세상 혼자 살아가던 사람들이 함께가 될때 느끼는 평안함도 알겠다.

그러나 그 양로원을 지키기 위해 몸을 판다든가 무리하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였지 않은가
함께여서 즐거울 순 있지만, 결국 세상은 혼자 사는 거라는걸 누구보다 절실히 알아왔을텐데.
양로원을 떠나야 할 순간이 다가오는걸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이상했다

마지막에 나름 밝은 분위기로 끝나는데
문제가 되던 양로원 재정이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뭔가가 문제로 보이면
그게 자신의 문제인거라 하던데.

어딘가 오래 머물지 못하는 내 문제가 이렇게 나타나는건가 싶기도 하다
안식처는 늘 있었지만, 떠나야 한다고 납득하면 망설이지 않았다

미련은 미련하다


2.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클럽에서 일반 지인에게 여장을 들켜 곤욕을 치르는데
사과하라며 악을 쓰는 딸의 모습에 오다기리 죠(남주 게이)는 오히려 따뜻하게 웃어버리는 거였다

화난 딸을 스테이지로 데려가 함께 춤을 춘다

모욕당한 게이 아재도 다른 게이 아재들과 함께 춤춘다

다같이 가게를 박차고 나가야 할거 같은데
마치 그런 일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자신들에 대한 박해를 받아들인다.

그건 저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정말 강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내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웃어넘기며 사는 자세랄까

아름다웠다


3.
한가지 뜨악했던 건
클럽 다녀오고 나서 둘이 섹스를 하려 했던 것

인간 좋아하는데 남녀가 어딨어 그럴수 있지 한단계 더 자유롭게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네 하면서도
여잔데? 자기 애인 딸인데? 하며 조마조마했다

결국

게이라(거기다 네코라)
좋아하는 여자랑 하질 못하네

라는 식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게이라 여자랑 못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지만
조마조마했다는 거 자체가 내 바닥을 보여준 거니

할말 없음


암튼 중고 DVD 랜덤으로 질렀는데
뜻밖에 재밌게 봤다
나머지도 기대해 봐도 좋을듯

설, 그리고 멀미 어쩌지

설이라 온가족이 모였다
끊임없이 티브이 소리가 난다
말소리 음식 만드는 소리 치우는 소리

이렇게 북적일 때면
스스로를 닫고 있는 기분이 든다
수더분하게 있기 위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숨긴다.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뭘 먹고 있는지 맛있는지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그러다 잠깐 화장실을 들르면
차단된 공간에 혼자가 되면 멀미가 난다

꽁꽁 숨어 있던 내가 잠시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누르고 있던 생각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이기도 하다

겨우 정신이 든 기분

이제 곧 올라가니까.
단란한 가족시간도 끝난다
자신만의 시간이 머지 않았다

너의 췌장이 먹고싶어(스미노 요루 소설) 오늘 만난 책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밝게 살아가는 여주인공과
그에 휩쓸려다니는 히키타입의 남주인공

구도는 전형적이다
그러나 풀어가는 방식이나 내용은 꽤 재밌었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가치는 같다든가
만남이나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라든가

여주인공이 하는 말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어서 이상하다

살면서 나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그것이 가능한 순간조차 어떤 혐오감과 결벽의 감정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조차

가령 지금 몇시간 전부터 뭔가 바삭한 게 먹고싶었지만 나가기 싫다, 역시 나가볼까, 아냐 울집 냥님이 내 몸에 올라타버렸으니 역시 이따 저녁이나 먹는 걸로 하자, 라는 사고의 흐름을 타고 계속 침대에 있는 나는 소설 속 남주인공에 가깝다.

어떤 작은 물결에도 휩쓸려가는 풀잎배

나는 이제껏 친구가 없었어, 라는 말을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인 여주에게 말할 수 있다니 존경스러웠다. 자신의 상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니까.

돌아가서, 왜 난 이토록 선택이라는 것에 질색하게 된 걸까.
고양이의 요구조차 이기지 못하는 내 풀잎배는 어쩌다 이렇게 만들어진 걸까.

아, 그래도 이젠 너무 배가 고픈데... 좀더 참아볼까
.
.
.
냥님께서 스스로 내 품에서 빠져나가준 덕택에 저녁을 먹고 다시 책을 펼쳤다


이 집안에서, 소설이지만 책이란 물건을 끝까지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영어를 다시 시작한다든가 그애에게 가르칠 준비를 하지 못하는건 역시 그애 책임이다.

그저 불쑥 책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내가 평소 하지 못했던 걸 하도록 만드는 녀석이
영어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못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 이 책, 몇 달 전에 별 생각없이 나왔던 화제인데 그 애가 왜 이렇게까지 집착한 건지 모르겠다

이 책, 결국 스스로 산거 같은데.
자신이 읽을 시간도 없는 책을 그저 내게 빌려주기 위해 산 거 같은 느낌

몇 번 빌려주겠다 말하다가 약간 반강제로 안겨주는 사태까지.

내가 읽고 있는걸 알고 꽤나 싱글벙글하는거 같고.
어쩐지 좀 기분나빠서 그냥 돌려줘버릴까 싶을 정도로 흐뭇한 웃음이었다

결국 다 읽어버렸다
결국 여전히 그애는 날 움직일 수 있다는걸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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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 때는 1월 초중순이었다

그애와 서먹할 때였고
ARM 선고도 받기 전이었다.
이럴려고 이 책이 눈에 들어왔나 싶기도 하다

실제로 처음 ARM선고를 받았을때
멘탈 잡는 데 꽤 도움이 되었다

아프건 건강하건
스스로 얼마나 평범한 일상을 산다 느끼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긴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가치는 같다

몸이 위험하다고 해서
거기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다
소중하다

이 책을 읽도록 도와준 그애에게 감사한다

발렌타인, 성공적 별처럼 만난 사람들

친오빠 생일이 발렌타인데이라
초콜릿을 만드는건 매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요새 이런저런 일이 많아 피곤하기 하지만
올해도 만들기로 했다

올해는 아망 드 쇼콜라.
아몬드에 설탕 초콜릿 코코아가루를 입힌 거다.
손이 많이 가지만 초콜릿 템퍼링만 조심하면
실패할 일 없는 레시피다
오븐이 엄마집에 가있어 사실 할만한게 이거 정도긴 하다

오빠걸 만드는 김에, 나와 같이 수고한 애들에게도.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 모두 주어서는 의리초코를 넘어 의무초코가 되어버리니까, 주고싶은 애들에게만 몰래.

그리고 그 안에 그 아이가 있다.
“그 아이”라 하는 것만으로
미소가 지어지고 어딘가 반짝이는 기분이 드는
그 녀석

받을 거다
다른 애들이 받는데
혼자 안받으면 그게 더 이상할 테니까

그래도 비교적 담담한 기분으로 만들고 전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웃음이 멈추질 않아
울집 고양이를 끼고 데굴데굴 굴렀다

받아주었다!
챙겨줘서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뿐인데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다니.
벅차오른다는 게 이런거구나 싶다



이걸 생일선물로 받은 오빠에게
좀더 신경썼어야 하나 미안할 지경
형제가 이렇게 쓸모가 없다

그래도 행복하다

올해는 좋은 발렌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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