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와 딸기 오늘은 뭐먹었니

집에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는 켜두고 갔는데.
온수 냉수 할 것 없이 아예 나오질 않았다

이미 지친 머릿속에는
보일러를 고칠 생각 같은 건 들지도 않았다

일단 난방은 작동하고 있으니 잘 순 있고
낼 출근 전까지 화장실을 몇 번 쓸 수 있을지라든가
씻으러 이 근처 사우나를 갈지, 낼 아침까지 버텼다가 회사 근처로 갈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집은 어떤 상황인지 물어나보자 싶어 윗집 문을 두드렸다.
주인집은 아니지만 이 주택에서 가장 오래 사셨다는 부부 분들이 문을 열어주셨다.


그분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많이 달랐다.

우선 물이 안나오는 건 우리집뿐.
그리고 이 얘기를 듣자마자 아무 망설임 없이 날 도와주셨다.

거침없이 우리집에 들어와 보일러를 만져보시더니 아저씨는 온수 파이프를 드라이기로 녹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일러 문제가 아니라며 밖으로 향했다.

이 날씨에 실내복 차림으로 바깥 배관을 뒤적인 끝에 열선 코드가 뽑혀있는 걸 발견했다.

수도 얼지 말라고 주인집이 설치해둔건데
이게 연결된 집에서 전기세 아깝다고 뽑아버린 거 같다고,
근데 원래 꽂혀 있던 콘센트가 짐에 파묻혀 접근이 안된다며 자기 집으로 척척 들어가시더니
십몇 미터쯤 되는 탭테이블로 다른 데서 전기를 끌어와 연결해 주셨다.

그 와중에 아주머니는 주인집에 대신 전화로 상황을 전해주셨고 주인집에서는 거듭거듭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수리공 전화번호를 받았지만 다행히 열선이 작동한지 30분도 되지 않아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호의였다.
인사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는 이웃이었건만.

아직도 조건없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 있구나. 신기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마트를 향했다.
늘 눈이 갔지만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딸기를 잔뜩 샀다.

스티로폴 박스에 든 큼직큼직한 딸기 한 상자
플라스틱 박스에 든 앙증맞은 딸기 한 상자

극구 사양하시는 걸
사는 김에 샀다며, 맛만 보시라고 들이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많이 달지는 않지만 향긋했다.

입안 한가득 터지는 딸기 과육.
벌써 봄이 온 듯한 따뜻한 기분.

영하 14도인 날 누리는 최고의 사치였다.